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명 6/등장 문명/로마 (문단 편집) === [[트라야누스]] === ||<-3><:>[[파일:Roman_(Civ6)_19.06.png|width=40]][br]{{{#f7d801 {{{+2 '''트라야누스'''}}}[br]'''Trajan'''}}}|| ||<-3><:>[[파일:트라야야.png|width=100%]]|| ||<-3><:>'''인용문''' || ||<-3><:> ''"분할하여 정복하라!"''[br](Divide et impera!)[* 트라야누스가 한 말은 아니고, 후에 지도자로 추가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말이다.] || ||<-3><:>'''소개'''|| ||<-3> 장대한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시여, 드넓은 세상을 보십시오. 당신의 군단병은 세상에서 가장 큰 제국을 설립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정말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하게 할 수 있다면, 당신의 제국은 굉장한 부와 호화로움의 제국이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분명히 당신을 최상의 통치자, 최고의 지도자라 칭할 것입니다. || ||<:>'''지도자 특성'''||<:>[[파일:external/vignette2.wikia.nocookie.net/Trajan_%28Civ6%29.png|width=50]][br]'''트라야누스의 기둥[br](Trajan's Column)'''||모든 도시가 추가적인 도심부 건물을 가지고 시작합니다.[br]고대 시대부터 시작할 경우 기념비 건물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안건'''||<:>'''최고의 지도자[br](Optimus Princeps)'''||자신의 제국 영토를 최대한 크게 넓히려고 합니다.[br]지배 영토가 작은 문명을 싫어합니다.|| ||||||<:>{{{#!folding [ 역사적 배경 펼치기/접기 ] 별다른 활약 없이 잠깐에 걸쳐 군림한 네르바에게서 황좌를 물려 받은 후 하드리아누스에게 자리를 넘겨 준 트라야누스 황제는 제국 영토 확장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 유능한 군부 출신 황제는 로마 원로회에 의해 옵티무스 프린켑스('지고의 황제')로 천명되었고 이러한 결과는 공정한 기준이 아닌 특정 관점에서 이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트라야누스는 다른 대부분의 황제에 비해 관대한 통치를 펼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대대적인 공공 건물 건축에 착수하고 진보적인 사회 정책을 구현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정책들은 그가 117년에 사망한 후 근시안적인 원로회에 의해 철폐되고 말았습니다. 트라야누스는 '5현제'의 두 번째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용어는 1503년에 마키아벨리가 만들어 낸 것인 만큼 아무래도 의구심의 여지는 존재합니다. 서기 53년에 히스파니아 바이티카의 로마 지역에서 활동한 명망 높은 원로 겸 장군의 아들로 태어난 트라야누스는 순수 로마 혈통이 아니었고 어찌 보면 이것이 호재로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제국군에 입대했고 제국에서는 군생활이 좋은 기회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단, 국경에서 벌어지는 끊이지 않는 전투에서 살아 남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트라야누스는 빠르게 진급을 이어갔고 가장 분쟁이 심한 지역에서 참전하여 유력 인사들의 존경을 얻었습니다. 그는 집정관 후보로 지명되었고 부유한 가문의 딸과 혼인을 올렸으며 근위병의 '종용'에 의해 새로운 황제 네르바의 수양 아들로 천명되었습니다. 참고로 오늘날에는 그가 혼외 관계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노쇠한 황제가 15개월 후에 사망하자 트라야누스는 그의 뒤를 이었고 네르바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즉시 신격화되었습니다. 평상시처럼 국경에서 활동하던 트라야누스는 로마에 입성하는 즉시 평민들에게 돈을 나누어 줌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확보했고, 또한 그는 간교하게도 권력을 거부하는 척 하며 뒤로는 부유한 원로회 가문들과 실리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트라야누스가 재임 기간 동안 주력한 일 중 하나는 의사 결정과 관련된 로마 원로원의 전통적인 특혜를 조금씩 없앤 것입니다.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트라야누스는 제국과 도시 전체에 걸쳐 건축 공사를 후원했습니다. 또한 그는 그가 황제였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간과하지 않도록 이러한 건물들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트라야누스의 이름을 업은 기둥, 포럼, 교각과 시장이 들어섰고 알칸타르(스페인)의 트라야누스 다리는 물론 수많은 다리, 수도와 여러 유용한 건축 시설이 곳곳에 생겨났습니다. 또한 그는 로마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개선문에도 많은 기금을 지원했습니다. 그의 군대는 동쪽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이러한 개선문이 연이어 건설됐습니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는 승리의 장군으로서 더욱 칭송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많은 석조 건축물도 땅과 노예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첫 정복지는 다뉴브 강을 품은 다치아 왕국이라는 '속국'이었습니다. 다치아는 십년 전에 도미티아누스 황제로부터 일방적인 평화를 '허가' 받는 수치를 겪었습니다. 트라야누스는 다치아를 통으로 집어 삼킨 후에 나바테아(현재의 요르단 남부 및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라는 성가신 속국까지 추가로 합병했습니다. 서기 113년, 트라야누스는 동부의 파르티아를 상대로 마지막 군사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당시 파르티아는 건방지게도 아르메니아의 왕을 후원했고 로마에서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트라야누스는 아르메니아로 진군하여 제국의 일부로 흡수한 다음 메소포타미아를 누비며 파르티아의 도시와 여러 속국들을 점령했습니다. 116년 말에는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왕을 폐위시키고 허울뿐인 왕국에 로마인을 통치자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같은 무렵에 트라야누스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소아시아 전역을 정복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도 전에 군단을 철수시켜 성가신 유대인 반란군을 진압해야 했습니다. 트라야누스는 자주 로마를 비웠지만 군중의 만족과 지지를 유지하여 존재감을 확고히 했습니다. 가장 반응이 좋았던 것은 콜로세움에서 3개월에 걸쳐 진행된 검투사 대회였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11,000여 명에 달하는 노예 및 죄수들과 수천 마리의 '맹수'들이 목숨을 잃었고 5백만 명이 넘는 군중이 콜로세움에 몰렸다고 합니다. 또한 트라야누스는 알리멘타를 만들어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알리멘타는 도시의 고아와 빈곤 가정 아동을 돕기 위한 정부 기금이었습니다. 이는 이탈리아 반도에 거주하는 로마 시민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제국의 여러 노력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전쟁, 놀이, 건축 및 공공 사업을 모두 진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트라야누스는 기존 정권에서 발생한 재무 위기에 대처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그는 감사 기관을 설립하여 엄밀히 따지자면 자유 신분인 그리스 도시의 공공 지출을 감독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이 기관에서는 제국의 징수세가 계속 오르도록 했습니다. 최근에 드러난 그리스의 부패 문제를 감안한다면 이는 현명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서기 107년, 트라야누스는 은화의 양을 줄이고 기존 황제들보다 많은 수의 데나리를 주조하여 로마의 화폐 가치를 떨어뜨렸습니다. 지출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트라야누스의 로마는 곧 재무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트라야누스는 아픈 몸을 이끌고 로마를 떠나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지만 셀리누스(나중에 트라야노폴리스로 개명)에 도착한 후 침소에서 부종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로마 황제 치고는 보기 드문 최후였습니다. 트라야누스가 사망했을 당시 로마 제국은 히스파니아에서 유프라테스 강과 스코틀랜드 변방을 넘어 나일 강 하류까지 이어지는 가장 광대한 영토를 보유했었고, 하드리아누스를 위시한 여러 후계자들은 국경을 요새화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물론 흥청망청 놀 때는 예외였죠.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